Presentation

규문

〈기쁨과 역량의 논리로 교환의 논리를 대체하기〉

각기 다른 시기에 다른 경로로 하나둘 규문에 연결된 청년 네 명이 올해부터 팀을 이뤄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각기 하고 싶은 공부도, 관심사도 다른 이들에겐 팀워크도, 함께 생활하고 활동하기 위한 노하우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이들은 공통감각을 기르기 위한 세미나를 했습니다. 공동체를 이루고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지금 우리에게 그것이 왜 필요한지, 우리가 무언가를 함께 해나감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는 익숙한 사고방식은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고 토론한 흔적들이 담긴 한 편의 글을 공유합니다.

0. 들어가며

‘고전비평공간 규문’은 혜화동에 있는 조그만 인문학 공동체다. 우리는 동서양철학을 공부하고 각자의 삶의 문제를 관통하는 글을 쓰는 것을 주된 활동으로 삼고 있다. 공부와 글쓰기를 매개로 제도화되지 않는 관계를 구축하고 자립적인 삶을 실험하는 것이 규문의 비전이다.
규문은 젊은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다. 규문에 공부를 하러 오는 주 연령층은 40대 이상이고 청년 대상 프로그램도 따로 없으니 그럴 법도 하다. 그 와중 각기 다른 시기에 다른 경로로 하나둘 이곳에 연결된 청년 네 명이 있다. 각기 하고 싶은 공부도, 관심사도 다른 우리 네 명은 올해부터 한 단위를 이뤄서 활동을 시작했다. 지난 5월에는 처음으로 우리가 한 팀이 되어 기획한 팝업 세미나를 진행했고, 내년부터는 우리가 연구실 운영을 일정부분 맡아서 하게 될 예정이다.
문제는 우리에겐 팀워크도, 함께 생활하고 활동하기 위한 노하우도 전무하다는 점이었다. 누구도 나서서 일을 끌어가려하지 않아 함께 기획했던 활동이 흐지부지되기도 했고, 프라이버시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서로를 방치하기도 했다. ‘함께’ 공부한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무지하고도 무능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우리는 공통감각을 기르기 위해 우리끼리 세미나를 했다. 공동체를 이루고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지금 우리에게 그것이 왜 필요한지, 우리가 무언가를 함께 해나감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는 우리의 익숙한 사고방식은 무엇인지, 우리는 몇 권의 책을 읽으며 함께 고민하고 토론했다. 그러한 고민들이 깃든 한 편의 글을 공유하고자 한다.

1. 삶의 가성비를 따질 수 있을까?

지금 나는 연구실 회계에서 활동비 명목으로 매달 지급되는 50만원과 세미나 매니저비, 연구실 홈페이지에 올라가는 글에 대한 원고료, 간헐적인 부수입 정도로 먹고 살고 있다. 매달 월세를 내고 통신료, 책값, 교통비, 유흥비 등등을 지출하고 나면 남는 돈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돈이 부족하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 연구실에서 식사를 해결하니 자연스레 식비에 대한 필요가 줄고, 활동반경이 좁아지니 교통비나 유흥비에 대한 필요도 줄어든다. 결코 경제적으로 넉넉하다고는 할 수는 없는 생활. 나는 이런 생활을 그럭저럭 ‘수용’하고 있다. 적절히 포기할 것을 포기하고 단념할 것은 단념하며.
그런데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나는 경제적 풍요를 단념했으나, 혹시 그러한 단념 자체는 경제적 계산에 따른 것이 아니었을까? 내 계산은 이랬다.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차를 사고, 집을 사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정상적인’ 삶은 너무 비싸다.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평범한 삶을 손에 넣기 위해 소모해야 할 것인가. 그게 진짜 나의 행복일지 알 수도 없는데 그런 위험한 투자를 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비싼’ 욕망들을 단념하고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는 않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며 사는 편이 낫다. 나는 내 삶을 의무와 책임, 하기 싫은 노동 같은 것들로 채우고 싶지 않았다. 그런 ‘하기 싫은 일들’로부터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그에 따르는 보상들도 흔쾌히 포기해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굉장히 단순명료한 계산법이다. 그런데 어쩌면 너무나 심플하다는 데 함정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에는 의무와 자유, 하기 싫은 일과 하고 싶은 일 각각을 대립적으로 실체화하는 이분법이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과 행위를 그런 식으로 간단히 구획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내게 달갑지 않은 수고로운 일들을 의무로 규정하며 부정하고 내 맘에 드는 즐겁고 쾌적한 순간들만을 자유로 여기며 긍정하는 것은 삶에 무례를 범하는 일이 아닐까? 나는 욕망과 행위와 삶의 ‘가성비’를 따지고 있었던 것 같다. 내 이해관계에 부합하지 않는 일에는 콩알만큼의 마음도 내지 않으려는 편협함이 여기에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2. 우리,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들

이러한 태도가 내게 ‘문제’로 다가온 것은 규문에서의 관계들로부터다. 이곳에는 각자의 역할을 정확히 구분하고 각자가 해야 할 일들과 그에 따른 보상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제도적 장치가 없다. 때문에 구성원 각각이 자발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으면 어떤 일도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보면 내 공부에만 집중할 수 없도록 하는 온갖 잡일들이 생긴다. 우리는 주방에서 하루 두 끼를 만들어 먹는데, 그렇게 하려면 밥을 하고 장을 보고 선물로 들어오는 반찬들과 식재료들을 관리하는 등 다양한 일들이 생긴다. 어떤 때는 선물 받은 김치를 정리하고 파를 썰고 주방 청소를 하다보면 한나절이 훌쩍 지나가기도 한다. 그러면 어김없이 또 저녁 준비를 할 시간이다. 그 외에도 홈페이지 관리와 크고 작은 디자인 작업들, 공부하러 오는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해 공간을 청소하고 세팅하는 일, 사람들 사이에서 생기는 문제들을 조율하는 일 등등 일이 끊이지 않는다. 정말이지 연구실 생활은 ‘돌봄’의 연속이다. 이런 일들 하나하나를 ‘업무’로 만들어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모든 일들을 손해나 희생으로 느낀다면 공동체 생활을 지속할 수가 없다.
처음에 언급한대로 올해부터는 연구실의 20~30대 네 명이 팀 작업을 하고 있다. 올해부터는 ‘클로즈업’이라는 제목으로 정기적인 기획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는데, 원래 가을에 세미나 하나를 오픈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다들 각자의 공부로 바쁜 와중에 누구도 자기 일을 제쳐두고 나서서 세미나 기획과 준비에 힘을 쓰지 않아 예정되어 있던 세미나가 엎어져버렸다. ‘의무는 최소한 자유는 최대한’이라는 나의 심플한 삶의 모토가 흔들리는 지점은 바로 여기였다. 학교나 군대, 알바를 했던 직장에서 내 전략은 정확히 먹혀들었다. 나는 의무로 부과되는 일에 에너지를 최소한으로만 들이고 업무가 끝나면 나의 사적인 자유를 누렸다. 쓸데없이 집단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고, 내게 부과된 업무에 지나친 책임의식을 가지지 않으려 노력하며 ‘나’의 영역을 지키는 것은 논리적으로 아무런 모순이 없었다. 그런데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의 구분이 희미한 공간에, 제도로부터 벗어난 전면적인 관계에 돌입하자 나의 태도는 누구와 무엇도 함께 나누지 못하는 무능력함으로 드러났다. 억압적인 제도가 싫고, 외부에서 부과되는 납득할 수 없는 명령에 따르는 삶이 싫어서 이곳에 왔다. 그러나 그러한 ‘거부’만으로는 무엇도 새롭게 구성해낼 수 없었다.
이러한 나의 태도는 내 또래들에겐 어느 정도 일반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외부로부터 부과된 의무나 책임, 규율에 대한 생리적 거부감과 어떤 집단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에 대한 본능적 경계심. 그런데 물론, 우리가 모든 종류의 의무와 책임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래라 저래라 하는 꼰대들의 참견, 연령이나 젠더, 계급 등의 코드에 따라서 우리의 행동거지를 구획하려는 사회적 관습들을 거부하지만, 고용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명령들에 대해서는 순순히 복종한다. 어떤 의무나 명령이 상거래의 언어로 표현될 때, 그에 대해 지불되는 임금으로 측정 가능한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그에 대해 더 이상 의문을 품지 않는다. 마치 누군가 대뜸 ‘좀 꾸미고 다녀라’라고 말하면 몹시 분개하지만 출근할 때 메이크업을 하는 것은 귀찮더라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나와 나의 동료들, 그리고 내 또래들이 책임감이 없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내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제도적으로 구획된 영역이나 돈으로 매개된 관계 바깥에서 다른 이들과 무언가를 함께 하는 데에 너무나 무능하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자본의 명령에 저항한다. 삶은 개발될 수 있다, 삶은 개발되어야 한다라는 당위를 부정한다. 미래의 어렴풋한 행복과 안정을 구하고자 현재를 희생시키라는 거짓 선동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런데 자본의 명령과 선동을 거부하고 구축한 우리의 사적인 자유와 소소한 행복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고 함부로 개입하지 않으며 자신의 이해관계를 벗어나는 일에 마음을 쓰는 것을 낭비라고 여기는 모래알 같은 개인들의 유토피아다. 그리고 그러한 모래알들을 이어줄 수 있는 것은 기브 앤 테이크가 확실한 교환의 논리뿐이다.
어떠한 잡음도, 균열도, 질척거림도 없는 매끈하고 쾌적한 관계만을 맺고 그러한 공간에만 머물고자 할 때 우리는 결국 경제적 주체 이외에 다른 무엇이 될 수 없다. 돈을 밝히는 사람이 꼭 경제적 인간인 것은 아니다. 경제적으로 마음을 쓰고, 교환의 논리에 따라 관계를 맺고, 비용 편익의 계산에 따라 삶을 조직하는 자야말로 경제적 인간이다. 그리고 그렇게 경제적으로 자기 삶을 관리하는 자에게는 속절없이 뿌리 뽑힌 개인으로서 시장 앞에 내몰리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

3. 부채의 역설

우리가 함께 공부한 책 중 하나는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부채》(부글, 2011)다. 이 책에서 그레이버는 경제학이 전제하는 ‘교환’의 논리를 넘어가고자 한다. 경제학은 말한다. ‘너는 세상에 빚진 것이 없다’라고. 그레이버에 따르면 이 별거 아닌 것처럼 들리는 말이 지닌 힘은 엄청나다. 이런 전제는 평균 가계부채가 소득의 130%를 상회하는 상황 속에서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빚을 진 것은 당신 자신의 탓’이라고 도덕적인 훈계를 하는 것을 정당화 한다. 또 IMF가 강요한 긴축정책 탓에 모기박멸 프로그램을 가동할 수 없게 된 마다가스카르에서 말라리아로 1만 명이 죽어가는 것을 ‘당연한 일’로 만든다. 어째서일까? 한 번 알아보자.
경제학적 전제를 따르자면 우리는 누구에게도 빚진 바 없는 평등하고 독립된 존재로 태어났다. 그러나 빚 없이 태어난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다른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누구도 다른 이들의 돌봄, 노동, 호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이렇게 다른 이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때 평등은 깨지고 관계의 균형추는 한 쪽으로 기울어진다. 그럼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정당한 값을 지불하는 것, 저울의 반대편에 같은 무게의 화폐나 서비스를 올려놓음으로 해서 균형을 되찾는 것이다. 그렇게 교환이 이루어지고 나면 평등이 회복되고 관계가 청산된다. 우리는 다시 빚 없는 개인으로서 훌훌 털고 제 갈 길을 갈 수 있다. 그렇다. 모든 사람들을 무엇도 빚진 바 없는 평등한 존재로 간주하는 경제학적 전제에는, 모든 인간적 상호작용들을 교환이라는 관점에 입각해 바라보는 시선이 숨겨져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인간들 사이의 상호관계가 교환의 형태로 이해될 때 도덕의 이름으로 끔찍한 일들이 자행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의무와 채무의 차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의무를 양적으로 계산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 호의나 존경, 감사를 빚지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는 상대가 누구이며 그가 필요로 하거나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언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이 느끼는 감사를 표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것이다. 우리가 의무의 크기를 숫자로 나타낼 수 없는 까닭은 의무를 둘러싼 두 당사자 사이에 교환의 논리를 초과하는 복잡다단한 관계의 맥락과 다양한 정서적 해석 작용들이 가로놓이기 때문이다. 채무는 순수한 교환의 논리 안에서 돈에 의해 양이 측정된 의무다. 이때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는 모든 인간적 관계들이 거세된다. 누군가가 12%의 이자로 4천만 원의 빚을 지고 있다면 채권자와 채무자 각각이 누구이며 어떤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오로지 원금과 이자율, 벌금과 차감잔액만 따지면 된다. 만일 당신이 가정을 포기하고 다른 지방을 떠돌아야 한다면, 그리고 당신의 딸이 탄광촌에서 매춘부로 일해야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지만 채권자에게는 지엽적인 일일 뿐이다. 어디까지나 돈은 돈이고 거래는 거래인 것이다.”1)
실제로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 2년 동안 마다가스카르의 산악지대에서 살다 온 그레이버는 말라리아로 죽어간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IMF에 의해 강요된 긴축정책으로 인해 1만 명이 무방비 상태로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다. 교환의 논리는 이것을 당연한 일로 만든다. 마다가스카르 정부가 시티뱅크에 빚을 졌으니 돈을 갚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빚을 져야 하는 것도, 그 빚을 채무자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하다. ‘너는 세상에 빚진 게 없다’라는 이 말은 사실 개개인들을 복잡한 인간적 관계로부터 뽑아내어 오직 교환의 논리만이 작동하는 시장경제로 재통합하는 마법의 주문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뿌리 뽑히고 나면 이제 경제논리는 도덕과 정의를 참칭하기 시작한다. 돈을 빌렸으면 갚는 것이 도덕이며, 기브 앤 테이크가 정확히 유지되는 것이 정의다. 이런 식으로 교환의 논리는 “도덕성을 산수로 바꾸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렇지 않았더라면 무도(無道)한 것으로 보였을 것들을 정당화”2)한다. 도덕의 탈을 쓴 경제적 논리를 넘어서지 못하는 한 채무자들은 자신의 무능을 탓하며 삶을 긴축하는 수밖에 없고, 개인들은 고립과 불안정성에 내몰릴 수밖에 없다.
나는 우리를 지배하는 불안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우리의 매끈하고 쾌적한 자유, 누구에게도 침해받지 않는 안락한 행복에는 늘 불안이 따라다닌다.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나와 나의 동료들)도 마찬가지다. 세미나를 하던 중 한 동료가 말했다. 자기는 무언가 혼자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터지면 그것을 연구실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큰 병에 걸리거나, 가족이 큰 빚을 져서 곤란한 상황이 생기거나, 무언가 사고가 나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경우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해결책은 공부를 접고 가족의 품으로 도망치거나 그마저 여의치 않을 때에는 어딘가에서 대출을 받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런 얘기를 나누며 우리는 우리에게 어떤 일들을 함께 겪어낼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불안’은 우리가 교환의 주체이자 뿌리 뽑힌 존재인 ‘나’를 넘어설 수 있는 관계의 기예를 터득하지 않는 한 사그라들지 않으리라는 것도.

4. 상호성이 깨진 상호작용

인류학자답게, 그레이버는 서구화되지 않은 사회에서 인간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교환의 논리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애덤 스미스를 위시한 경제학자들은 늘 태초에 ‘물물교환’이 있었다고 주장해왔다. 인간은 본디 교환하는 동물이고 본성적으로 경제적인 인간이며, 따라서 화폐가 발명되기 전에는 ‘내가 구두를 줄 테니 내게 쌀을 달라’는 식의 물물교환의 원리가 사회를 지탱했을 것이라는 단순한 추측. 그러나 그레이버에 따르면 인류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이 부족사회나 원시사회에서 발견한 것은 원시적 교환관계가 아니라 “상호성(reciprocity)에 대한 기대가 깨질 수 있는 상호작용”3)이다.
19세기에 아프리카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은 이에 관한 다채로운 증언들을 전하고 있는데, 선교사가 병에 걸리거나 사자에게 물려서 죽을 위기에 처한 현지인들을 치료하자 그 환자들이 대뜸 선물을 요구하더라는 것이다. 그 아프리카인 환자들이 실제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누군가에게 목숨을 구원받았을 때 이들은 갚아야 할 빚을 졌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목숨을 매개로 한 단단한 유대가 생겨난 것으로 생각했으리라는 점이다. 선교사가 현지인을 구하는 순간 두 사람은 모든 것을 나눠 갖고 상대방이 곤경에 처할 때마다 서로를 돕는 형제관계 같은 것으로 연결된 것이다. 그러니 그 환자는 새로 생긴 부유한 형제에게 너무나 당당하게 선물을 베풀어줄 것을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반대로 환자가 선교사에게 보답을 한다면 그것은 모욕이 될 것이다. 생명을 구해줬음에도 그와 더 이상 인연을 맺을 뜻이 없으며 관계를 청산하고자 한다는 표시가 될 테니 말이다.
인간은 교환하는 동물이며 받은 것을 그대로 갚아주는 상호성이야말로 정의의 근간이라는 것은 근대적 전제일 뿐이다. 자본주의 이전 혹은 외부의 사회에서 많은 경우 인간들 사이의 상호작용은 교환이 아니라 증여의 원리에 입각하여 이루어졌다. 20세기 중반 호주 웨스턴 아넘 랜드의 군윙구족의 경우에도, 비슷한 시기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들 사이에서도, 브라질의 남비콰라 족에게서도 마찬가지다. 그레이버가 제시하는 다양한 예시들 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것은 덴마크의 탐험가 페테르 프로이켄의 《에스키모의 책》에 나오는 그린란드의 이누이트 사냥꾼의 일화다. 프로이켄은 해마사냥을 위해 먼 길을 떠났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온 뒤 해마를 잡은 사냥꾼이 몇 백 파운드의 고기를 자기 앞에 내려놓는 것을 본다. 프로이켄이 감사를 표하자 사냥꾼은 오히려 화난 표정을 짓는다.

“여기 사는 우리 모두는 인간이오!”라고 사냥꾼이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서 서로서로 도와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일로 감사하다는 말을 듣길 좋아하지 않아요. 오늘 내가 얻은 것을 내일 당신이 얻을 수도 있어요. 여기 속담에 선물이 노예를 만들고 채찍이 개를 만든다는 말이 있어요.”4)

여기서 사냥꾼은 경제적 계산을 할 줄 알고 교환의 원리에 따라 ‘평등한’ 관계를 맺는다는 이유에서 자신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진정으로 인간다운 존재는 그러한 계산을 거부하는 존재라고,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주었는지를 계산하거나 기억하기를 거부하는 존재라고 주장”5)한다.
사실 상호성이 깨진 상호작용의 예를 발견하기 위해 굳이 시공간을 거슬러 갈 필요는 없다. 우리가 그것을 포착해내는 눈만 갖고 있다면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또 한번 그레이버의 예를 빌리자면 두 사람이 고장난 수도관을 고치는 중에 누군가 ‘그 렌치 좀 줘요’라고 말하면 동료 근로자는 ‘그러면 그 대가로 뭘 줄 건데?’라고 묻지 않을 것이다. 일의 효율성을 위해서조차 계산하지 않는 도움과 나눔이 요청된다. 그리고 블랙아웃이나 경제적 붕괴 같은 대재앙의 직후에도 사람들이 교환의 논리를 간단히 저버리는 사례들이 무수히 발견된다. 비학술적 학술제 준비 세미나에서 함께 읽은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2020)에서 빈번히 언급되는 ‘돌봄’ 또한 그런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취약성과 유한함을 가진 유기체로서의 몸인 한”6) 우리는 누구나 다른 누군가의 돌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인간의 삶이 제도적 관리와 상품 소비의 격자 안에서 조직화된다고 한들 우리 삶에서 계산되지 않는 돌봄의 요소들은 결코 제거될 수 없을 것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돌봄을 넘어서 우리가 인간이 아닌 존재들로부터 아무런 대가 없이 받고 있는 것들에까지 생각이 미치면, 우리가 다른 존재들과 맺는 관계에 교환의 형태를 부여하려는 노력이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깨닫게 된다.
결국 ‘교환’을 말하는 것의 효과는 무엇인가? 그 효과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비(非)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가 없는 돌봄을 무가치한 것으로 평가절하하고, 제도나 시장에 의존하지 않고도 관계와 나눔의 원리에 따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의 역량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5. 기쁨과 역량의 논리로 교환의 논리를 대체하기

우리가 시장 앞에 내몰린 교환의 주체일 때 자립이란 당연히 경제적 안정을 손에 넣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때 경제적 안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삶을 최대한 덜 겪기 위한 방편이다. 자신의 몸을 수납할 수 있는 안락한 아파트에서 배달 음식을 시켜 먹으며 온갖 스크린들과 마주앉아 무료함을 달래고, 갑자기 삶에 회의가 들 때는 훌쩍 해외여행을 떠난다. 타인의 온기가 그리울 때는 데이팅앱을 켜고, 우울감에 휩싸일 때는 심리상담사에게 가고, 건강이 염려될 때는 의료 전문가와 헬스트레이너에 의존한다. 이때 삶이란 연결된 토막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의 자립은 사실 고립이자 분리다. 타인들로부터의 고립과 분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고립이고 분리이기도 하다. 관리되는 삶. 이러한 삶 속에서 삶의 다양한 국면들을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오롯이 겪어내고 긍정할 수 있는 지혜와 기예는 생겨나지 않는다.
무엇으로 교환의 논리를 돌파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의존을 더 큰 의존으로 대체할 뿐인 것처럼 보이는 경제적 자립을 넘어서, 자립의 새로운 이미지를 그려볼 수 있을까? 그 실마리를 얻기 위해 우리가 함께 읽은 또 다른 책은 프랑스 타르낙에서 활동하는 혁명가 그룹 보이지 않는 위원회의 《코뮨이 돌아온다》(2019)다. 보이지 않는 위원회는 사람들이 제도나 자본에 의존하지 않고 서로를 돌보며 함께 갈등하고 또 공모하는 상태를 ‘코뮨’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일련의 우연한 마주침들과 더불어 코뮨이 형성될 때, “각자가 혼자 밥벌이를 하고 혼자 잠을 자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성장하고 혼자 건강을 돌봐야 하는, 우리 모두가 혼자인 삶”7)은 자취를 감춘다. 혼자인 삶이 사라진 자리에는 사적인 쾌적함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기쁨들이 생성된다.

“모든 코뮨에 동반되는 기쁨이 거기서 생겨난다. 삶은 돌연, 연결된 토막들로 분해되는 것을 멈춘다. 자는 것, 투쟁하는 것, 먹는 것, 건강을 돌보는 것, 축제를 벌이는 것, 음모를 꾸미는 것, 토론하는 것이 모두 하나의 생명[삶]의 운동에 속한다. 모든 것은 조직화되지 않고 스스로 조직화한다. 차이는 현저하다. 하나는 관리를 부르고, 다른 하나는 주의를 부른다. ―이 둘은 고도로 양립 불가능한 태도[경향]이다.”8)

보이지 않는 위원회는 함께한다는 것은 단순히 위험을 분담하거나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함께한다는 것, 코뮨을 형성한다는 것은 삶의 여러 국면들을 ‘하나의 삶의 운동’ 속에서 겪어나갈 수 있는 공동의 역량을 구성하는 것이다. 코로나 같은 위기를 맞이할 때에도 ‘개인’은 단지 마스크를 비축하고 제도적 지침을 일방적으로 따르며 불안에 지배당하거나 ‘뉴노멀’에 발 빠르게 적응하는 것 외에 다른 방식으로 이 위기를 겪어내기 어렵다. 그러나 코뮨은 위기를 이해하는 공동의 담론을 형성하고, 서로를 돌보고 서로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위기에 지배당하지 않고 위기를 겪어낼 수 있는 역량을 형성할 수 있다. 서로의 사적인 영역을 지키고, 각자가 혼자 삶을 견디도록 취약함 속에 내버려두는 교환과 경쟁의 관계에서는 이러한 힘이 생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공동의 역량에 동참하는 것, 하나의 삶의 운동 속에서 삶을 겪어내는 것은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 이것이 우리가 함께 자립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관리가 아닌 주의. 구체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이것을 어떻게 실행할 수 있을까? 우리(나와 연구실 동료들)는 매주 하고 있던 회의를 조금 변형해보기로 했다. 함께 팀 단위로 활동을 하게 된 뒤로 우리는 회의를 해왔지만, 그 회의는 ‘관리’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각자가 맡은 일들의 진행상황을 공유하고 함께 결정해야 할 일들을 검토하는 정도. 우리는 우리가 마치 이 공간 운영을 맡은 관료들인 양, 회의에서 오직 필요한 말들만을 주고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관료적인 일처리를 하려다보니 정작 돈을 쓰고 행사를 진행하고 계획을 세우는 등등의 일들 안에서도 우리만의 공통의 기준과 공통의 감각이 형성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회의 시간을 서로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장(場)으로 삼기로 했다. 회의를 각자가 고민하는 지점, 각자의 욕망과 감정, 각자가 한 주 동안 공부를 하며 느낀 것들이나 풀리지 않는 지점들 등등을 함께 나누는 시간으로 만들어보기로 한 것. 이 이상한 회의가 어떻게 진행될지, 얼마나 지속될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것이 우리가 공동의 역량을 형성해갈 수 있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1) 데이비드 그레이버, 《부채》, 부글, 25쪽
2) 데이비드 그레이버, 《부채》, 부글, 25쪽
3) 데이비드 그레이버, 《부채》, 부글, 165쪽
4) Freuchen, peter. 1961: 154. 'Book of Eskimo'. Cleveland, Ohio: World Publishing Co. 데이비드 그레이버, 《부채》, 부글, 141쪽에서 재인용
5) 데이비드 그레이버, 《부채》, 부글, 142쪽
6) 추지현 엮음,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 돌베개, 22쪽
7) 보이지 않는 위원회, 《코뮨이 돌아온다》, 그린비, 49쪽
8) 보이지 않는 위원회, 《코뮨이 돌아온다》, 그린비, 82쪽



〈고전비평공간 규문〉은 혜화동에 있는 조그만 인문학 공동체입니다. 동서양철학을 공부하고 각자의 삶의 문제를 관통하는 글을 쓰는 것을 주된 활동으로 삼고 있습니다. 공부와 글쓰기를 매개로 제도화되지 않는 관계를 구축하고 자립적인 삶을 실험하는 것이 규문의 비전입니다.